경기도 수원에 자리한 화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한 왕의 정치적 이상과 도시 실험이 집약된 공간이다. 정조는 부친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새로운 도시를 구상했고, 그 결과 탄생한 화성은 조선 후기 사회가 도달한 기술과 사상의 정점을 보여준다. 정조의 이상이 담긴 수원 화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정조가 꿈꾼 새로운 도시와 화성의 탄생
화성은 조선 후기 정치사와 깊이 연결된 공간이다.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깊은 효심과 함께, 기존 정치 질서를 넘어 새로운 통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의지가 담겨 있다. 정조는 장헌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단순한 능 이전에 그치지 않고, 그 주변에 새로운 도시를 조성하는 대규모 계획을 세웠다. 이는 기존의 읍치 중심 도시 구조를 재편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거점을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다.
화성은 1794년 2월에 착공되어 약 2년 반 만에 완공되었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5.74킬로미터에 이르며, 높이 4미터에서 6미터에 이르는 성벽이 약 130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면적을 감싸고 있다. 이는 단순히 군사적 방어만을 목적으로 한 규모가 아니라, 실제 주민들이 생활할 수 있는 도시 공간을 염두에 둔 설계였다. 화성은 거주 기능을 가진 읍성과 군사적 방어를 위한 산성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성곽 도시라는 점에서 이전의 조선 성곽과 뚜렷이 구별된다.
정조는 화성을 통해 백성과 함께하는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상업과 유통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시장을 조성하고, 주민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행정과 군사 시설을 체계적으로 배치했다. 이는 단순히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새롭게 설계하는 일이었다. 화성은 왕권의 상징이자 개혁 군주로서 정조의 정치적 실험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과 과학이 만난 화성 축성 기술의 특징
화성이 지닌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축성 방식이다. 화성은 조선 시대 성곽 가운데 드물게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 아래 신축된 성곽이다. 이전의 성곽들이 전쟁이나 필요에 따라 점진적으로 확장되거나 보수되었다면, 화성은 설계 단계부터 도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구조로 구상했다. 이 점에서 화성은 조선 성곽 기술의 집대성이라 평가받는다.
특히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더해 동양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실학 사상이 확산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조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개방적이었다. 거중기와 녹로 같은 기계 장치를 활용해 공사 효율을 높였고, 이를 통해 짧은 기간 안에 대규모 성곽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비의 사용은 노동력을 절감하는 동시에 공사의 정확성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화성에는 포루 공심돈 암문 적대 등 다양한 방어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외부의 공격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고려한 입체적인 구조였다. 또한 화성은 주변 지형을 억지로 깎아내지 않고 자연 지세를 최대한 살려 조성되어 인공 구조물임에도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화성성역의궤가 전하는 조선 후기의 기록 정신
화성의 가치는 그 건설 과정이 매우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는 공사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준공 보고서다. 이 기록에는 설계 도면 사용된 자재 인력 동원 상황과 비용까지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이는 조선 후기 행정과 기록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화성의 구조와 배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화성은 눈으로 보는 문화유산이자 문헌으로 읽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정조의 개혁 의지와 조선 후기 사회의 기술 수준이 성곽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수원 화성은 과거의 유산이면서도 오늘날까지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살아 있는 도시 유산이다. 정조의 이상은 성곽이 되어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우리에게 조선 후기의 꿈과 실험을 조용히 들려주고 있다.